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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7개월에도 이혼 판결… 법원 “끝난 관계”

2022-03-18

책임 따지는 ‘유책주의’ 아닌 現상태 중시하는 ‘파탄주의’ 판결 잇따라

 

 

30대 A씨는 결혼 후 남편이 자신에게 학력을 대졸로 속인 사실을 알게 됐다. 변변한 직업도 없던 남편은 결혼 후에도 휴대폰 이성 교제 앱으로 다른 여성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A씨는 2021년 4월 친정으로 간 후 이혼소송을 냈다. 남편은 “가정을 유지하고 싶다”며 이혼을 반대했다.

 

서울가정법원은 작년 12월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파탄에 이르렀다”며 이혼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파탄의 근거 중 하나로 “별거 기간이 7개월에 이르고, 개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점”을 들었다. 이를 두고 법조인들은 “파격적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남편의 거짓말 등으로 이전부터 신뢰 관계가 깨지긴 했지만, 이 정도의 별거 기간으로 파탄이 인정된 경우는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법원이 ‘파탄’으로 인정하는 별거 기간이 짧아진 경향은 다른 판결에서도 발견된다. 본지가 작년에 ‘혼인 파탄’으로 이혼이 인정된 판결문 중 6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별거 기간이 모두 3년 미만이었다.

 

2018년 부부 갈등으로 별거를 시작했고 이듬해 아내가 이혼을 청구한 사례에서 법원이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인정하기도 했다. 남편이 짐을 가지러 갔다가 몸싸움이 일어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소송 전까지 별거 기간이 채 1년이 되지 않은 경우였다.

 

30여 년의 결혼 기간 대부분을 남편이 생계를 저버리기는 했지만, 별거 자체는 1년 남짓이었던 사안에서도 이혼이 인정됐다. 법무법인 YK 장예준 변호사는 “4~5년 전만 해도 별거로 인한 혼인 파탄이 인정되려면 별거 기간이 10년 이상이어야 했는데 상상할 수 없는 변화”라고 했다.

 

이 같은 현상을 두고 이혼소송에서 ‘파탄주의’가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유책주의’에서는 이혼소송에서 외도⋅폭행 등 상대방의 잘못이 있는 경우 이혼 판결이 나는 게 원칙이다. 유책주의에 따라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는 이혼소송을 제기해도 이길 수 없다. 과거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여성 배우자를 보호하는 측면이 강했다.

 

반면, 파탄주의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혼인 파탄’ 상태이면 이혼이 인정된다. 아직 우리 대법원은 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지만 하급심에서 파탄주의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논란이 된 이혼소송들이 3심까지 갈 경우 대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별거 기간으로만 보면 전환의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파탄주의를 채택한 나라들의 경우에도 쌍방이 이혼에 합의하지 않으면 5년(영국), 3년(독일) 이상의 별거 기간을 요구하는데, 최근 국내 법원에서 그보다 짧은 별거 기간에도 이혼을 인정하는 판결이 속출했다.

 

애정이 완전히 식고 신뢰 관계가 깨졌으면 이혼 판결을 내리는 파탄주의 확산으로 예상치 않게 이혼을 당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한 30대 전업주부는 2019년 남편에게 이혼소송을 당했다. 그는 친정에서 사업 자금을 지원받은 남편이 처가의 간섭을 문제 삼는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해 말 법원은 이혼 판결을 내렸다. 2019년 말 아내에게 성격 차이 등으로 이혼소송을 당한 40대도 자신이 아이들을 돌보는 사진 등을 제출하며 가정 생활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이혼 판결을 받았고, 재산 분할금으로 수억원을 물어주게 됐다.

 

이혼을 낸 사람이 승소하는 비율도 높아졌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법원에 접수된 이혼소송 건수는 2018년 2만5382건, 2019년 3만5277건, 2020년 3만3277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이혼소송을 제기했던 원고가 일부라도 승소한 비율은 2018년 25.6%(6504건), 2019년 31.9%(1만1261건) 2020년 34.5%(1만1499건)로 꾸준히 높아졌다.

 

가정법원 관계자는 “사회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문제되지 않던 사소한 생활 습관의 차이나 성격 차이에 대해서도 ‘못 참겠다’고 이혼소송을 내고,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실제로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가사소송이 전문인 한 변호사는 “파탄 기준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파탄주의로 가면 가정이 어이없이 깨지는 경우가 양산될 수 있고, 바람피운 쪽이 악용할 우려도 있다”며 “이혼 후 상대방의 생활 보장 등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유책주의, 파탄주의

 

유책주의는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혼을 청구할 수 없게 한 제도다. 외도 등 부정을 저지른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제한해 가정 파탄에 책임이 없는 배우자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주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반면 파탄주의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혼인 파탄’ 상태이면 이혼을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측면이 크고, 혼인 파탄 여부는 별거 기간 등을 고려해 판단한다. 우리 대법원은 아직 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기사 링크: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678721